전자정부 로고 이 사이트는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사이트입니다.
이슈포커스

여성폭력 예방과 근절, 폭력 피해자에 대한 지원을 위해
전문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이슈포커스

[진흥원X헤이메이트_우리가 사랑한 모든 여자들에게]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황효진)

  • 작성자홍보담당자
  • 작성일2021-05-25
  • 조회1517




<프란시스 하>에 관한 지난 편지를 읽으며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떠올렸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거든요. 아직 세상 밖으로 나가지는 못한 글이지만요. 영화 현장에서 프로듀서(PD)로 일했던 40대 여성 찬실이는 늘 함께했던 감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원치 않게 일과 일터를 모두 잃게 됩니다. 오랫동안 경력을 쌓아왔고 언제나 성실했으니 누군가 다시 기회를 줄지도 모른다고 기대하지만, ‘네가 한 일이 뭐가 있냐’는 매몰찬 반응만 돌아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된 거예요. 힘없이 집으로 돌아온 찬실에게 하숙집 할머니는 PD가 뭘 하는 직업이냐고 묻습니다. 나름대로 설명해보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그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해요.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일이냐고.” 찬실이는 대답합니다. “예? 아, 저도 이제 모르겠어요.”



“아, 망했다. 완저이 망했네. 와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 

시집은 못가도 영화는 평생하고 살 줄 알았는데...”


영화를 본 이후부터 이 장면이 계속 마음속에 남아있었어요. 프란시스가 실제로 원하는 일을 하지 않고/못하고 있어서 직업을 설명하지 못했다면, 찬실이는 경력을 쌓아왔고 심지어 그 일을 사랑하기까지 했지만 그 사랑이 밖에서 볼 땐 별거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여성입니다. 분명 나는 시간과 에너지와 애정을 들여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시간이 통째로 의미 없었던 것으로 치부된다면 어떨까요? 내가 했던 일을 누군가에게 아무리 열심히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요? 요약하고 보니 나조차도 ‘그 일은 대체 뭐였을까?’라고 생각하게 된다면요? 출산이나 육아를 포함해, 찬실이처럼 다양한 이유로 경력 단절을 겪는 많은 여성이 ‘일을 했지만 내 것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겠지요. 


일이 나의 모든 것처럼 느껴질 때


일이 나의 모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내 삶도 의미 없는 것 같고, 일로서 모든 욕구가 충족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예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더욱 그럴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일은 곧 나 자신이기도 한 것 같으니까요. 일은 내가 아니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으로는 인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며, 제가 한 번도 일하지 않는 상태의 저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이었죠. 내가 나중에 아무 일도 하고 있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일하지 않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면 어쩌지? 이런 두려움 때문에 그동안 일을 계속 벌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지내왔는지도 모릅니다.


일은 삶 속에 있을 뿐, 일이 절대 삶을 삼킬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나 찬실이는 곧 알게 됩니다. 영화를 사랑한다면, 다른 방식으로 그 사랑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영화가 끼어있지 않은 삶 속에도 좋은 게 많이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하고 마음을 나누는 그 모든 순간 속에도 삶의 진실이 깃들어있다는 것을. 내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때가 온다고 해도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거기서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들만큼은 나에게 소중히 남아있다는 것을. 일은 삶 속에 있을 뿐, 일이 절대 삶을 삼킬 수는 없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저요, 사는 게 뭔지 진짜 궁금해졌어요. 그 안에 영화도 있어요.”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찬실이와 동료들은 전구를 사기 위해 깜깜한 밤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찬실이는 맨 뒤에 서서 랜턴의 빛으로 동료들이 걸어가는 길을 환하게 비춰주지요. 찬실이가 비추는 빛이 영화를 보고 있는 30대 여성인 저에게도 드리워지는 기분이었어요. 막연하게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말고 찬실이가, 혹은 나보다 더 오랜 세월을 살아온 다른 여성들이 먼저 간 길을 희미한 빛과 함께 잘 더듬으며 천천히 걸어가면 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일이 아니더라도 인생에는 좋은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믿으면서요. 그렇게 생각했더니 정말로 용기가 좀 솟아오르는 것 같더라고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한 것 같네요. 아이러니하게도, 일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말을 하기 위해 꽤 긴 글을 일 이야기에 할애했습니다. 다음에는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아시다시피, 여성들의 삶은 일보다 크고 거기에는 아주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으니까요. 



황효진 


 

작가 소개 [황효진]

-더 나은 여성의 삶을 위한 콘텐츠팀 헤이메이트’ 멤버

여성들의 커리어 상호성장 커뮤니티 뉴그라운드’ 공동대표

자매애 고취방송 팟캐스트 [시스터후드운영 중

저서 [둘이 같이 프리랜서], [여자들은 먼저 미래로 간다], [여자들은 같이 미래로 간다], [일하는 여자들], [아무튼잡지], [나만의 콘텐츠 만드는 법]

前 엔터테인먼트 중심 온라인 잡지 [아이즈]와 [텐아시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