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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72호]<페미니즘 책으로 읽기> '내 이름은 김복동' - 김숨,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거야」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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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김복동"
- 증언집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를 읽고



유튜브 '채널 수북' 운영자 '리외'


 하나의 인생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익히 들은 이름,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이야기일지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의 인생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들을 준비가 되어 있을까? 개인의 생애가 내게로 옮겨올 때, 그 목소리에 우리는 얼마나 오래 귀를 열어둘 수 있나? 사회적 문제, 풀리지 않은 역사의 과제에 연루된 개인들의 목소리는 해석 투쟁의 증거로만 채록되어온 것은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가 실제 그 개인에 대해 아는 것이 지나치게 적지는 않은가?


 그녀의 이름은 김복동. 병인년(1926년) 범띠. ‘복받은 아이’라는 뜻이다.

딸 여섯인 집안의 넷째딸. 아버지는 그녀가 여덟 살에 돌아가셨다.

집을 떠나던 해, 그녀는 열다섯 살. 일본 군인들이 와서 군복 만드는 공장에 손이 모자라 그녀가 가야 한다고 했다. 3년만 일하면 된다고 했다. 거절하지 못한 엄마를 그녀는 원망하지 않는다. 딸을 내놓지 않기면 배급이 끊겼으니까.


  고향 양산에서 부산까지, 일본 군인이 운전하는 지프를 타고 갔다. 부산 제2부두에서, 총을 든 군인이 지키는 창고 같은 곳으로 보내졌는데, 그곳에 그녀와 같은 여자애들이 스무 명 넘게 있었다. 공장에 간다고 하더라. 그런 말을 주고받은 뒤, 캄캄한 밤에 그들은 연락선을 탔다. 시모노세키 부두까지 가서, 창고의 다다미방에 누워 일주일쯤을 보내고, 다시 배를 탔다.


 대만이라고 했다. 광동이라고 했다. 홍콩이라고 했다. 수마트라라고 했다. 자바라고 했다.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 채 군인들이 데리고 다니는 데로 끌려 다녔다. ‘그곳’에 가서야 알았다. 군복 만드는 공장이 아니라 군인 받는 공장임을.


군인들이 트럭을 타고 왔어.
군인을 하루에 열다섯 명 정도 받았어.
토요일, 일요일에는 50명 넘게 받았어.
일요일에는 아침 여덟 시부터 저녁 다섯 시까지 군인들이 왔어.
저녁을 먹고 있으면 장교들이 어스름을 망토처럼 두르고 왔어.
밤늦게 온 장교가 새벽까지 가지 않으면 잠을 못 잤어.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p.77)


 그 이후, 그녀는 계절이 없는 곳에 살았다. ‘그곳’에는 밤과 낮만 있었다.

그녀는 화장을 하고, 군인들이 민가에서 약탈해온 옷을 입었다. 미싱으로 옷을 지어 입기도 했다. 군인들은 그녀를 ‘가네무라 후쿠코’라고 불렀다. ‘가네’는 돈, ‘무라’는 마을, ‘후쿠코’는 행복하게 사는 아이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 이름이 싫지 않았다.

열여섯 살, 그녀는 군인에게서 담배를 배웠다.

열아홉 살, 그녀는 죽다 살아났다. 의식을 잃을 정도로 열이 올랐다. 홍진이었다. 펄펄 끓는 몸으로, 그녀는 꿈을 꾸었다. 일찍이 돌아가신 아버지가 나타나, 그녀더러 왜 여기에 왔느냐고 꾸짖으며 내쫓았다. 아버지는 저승에서 죽은 이가 오면 이름을 적는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군인들이 오지 않았다. 옷만 챙기고 다른 건 모두 버린 채 트럭에 올라, 또 다시 실려 갔다. 싱가포르 제10육군병원. 삼백 여 명의 다른 여자들과 함께 간호 훈련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 조선이 해방되었다. 그녀는 몰랐다.


  처음 보는 조선인 남자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겁이 났다. 남자는 대만에서 자신이 사진과 함께 부쳤던 편지를 들고 있었다. 이종 언니의 남편, 그녀의 형부였다. 조선 여자가 있다는 곳을 다 뒤지고 다녔다는 그는 결국 그녀를 찾아냈다. 그들은 함께 미군 포로수용소로 갔다. 이따금 “배가 왔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선까지 태우고 갈 배를 그들은 하염없이 기다렸다. 한나절을 꼬박 걸어갔다 배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탄식하며 돌아오기를 몇 번. 이윽고 배를 타게 되었고, 조선으로 돌아왔다.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여럿이 죽었다.


 다시 부산 제2부두 앞바다. 그녀는 고향 양산으로 돌아갔다. 엄마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부 한 모를 들고서. 7년 만이었다.

같이 돌아온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 중 여럿은 부산 남포동의 ‘유곽’에서 돈을 벌었다. 그녀는 나중에야 알았다. 고향 집에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아서, 돈 한 푼 없이 돌아왔기에 돈을 벌어 돌아가려고, 이것밖에 배운 게 없어서, 이유는 여럿이었다.


군인들에게 끌려다닐 때, 나는 나를 찾지 않았어.
해방되고 다들 나를 찾을 때도,
나만 나를 찾지 않았어.

나 없이 살았어, 나 없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아침이었어.
눈을 떴더니 내가 예순두 살이었어.
까만 원피스에 까만 구두를 신고 집에 돌아왔을 때 스물두 살이었는데.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 p.135)


 스물두 살, 당시로서는 이미 노처녀였다.

시집가는 것을 꼭 보고 싶다던 엄마에게 자신이 겪은 일을 말했을 때, 엄마는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런 일을 겪고 사람이 살 수는 없다고.

스물세 살, 그녀는 고향이 의령인 한 남자를 만났다. 그녀보다 아홉 살 많은 이혼한 트럭 운전사였다.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일본에서 공장에 다녔다고, 한 번 결혼했다 실패했다고. 그는 그녀를 많이 사랑했다. 그녀를 너무 좋아하는 게 그녀는 싫었다.


 그녀는 <전생록>을 가진 할아버지를 찾아갔다. 할아버지는 그녀의 전생이 옥황상제의 딸이었다고 했다.

자식을 다 죽인 벌을 받아 먼 땅으로 쫓겨났다고, 그래서 이생에 삼신할미가 자식을 주지 않는 거라고.

자식을 달라고 부처님을 모시기도 했다. 군인을 ‘받던’ 곳에서 불임주사(606주사)를 맞았기에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이미 불임의 몸이 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이후에는 다른 것을 빌었다. 아프지 말고 세상 떠나게 해달라고. 그러나 그녀는 암에 걸렸다.

그 이후로는 관세음보살을 찾지 않았다. 기도가 헛짓 같아서. 티비도 틀지 않았다.

전생이 아니면, 전생에 지은 죄가 아니면 이생에서 겪은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전생을 알고 나서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받아들였을까.


 1960년대 말, 그녀가 사십 대가 되었을 무렵, 양산 부근 경부고속도로를 놓는 공사가 한창일 때,

그녀는 인부들을 따라다니며 함바집을 했다. 고되었지만 음식 만드는 게 즐거웠다.

그러다 공사를 맡은 산업(회사)이 망했고, 그녀의 가게도 함께 망했다.


 먹고 살기 위해 다대포로 내려갔다. 해수욕장 근처 횟집들을 돌아다니며 음식 만드는 걸 배웠다.

구멍가게와 살림집이 딸린 무허가 횟집을 샀다. 피서철에는 사람이 몰렸고, 그때 번 돈으로 겨울을 났다.


 쉰두 살. 돈이 한창 잘 벌릴 때, 남자가 설암에 걸렸다. 37년을 함께 산 남자.

이가 다 빠지고 혀가 녹아버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장사로 번 돈이 전부 병원비로 들어갔다. 8년 뒤, 남자는 죽었다.

그녀의 나이 예순 살. 남자는 죽을 때까지 그녀가 어디에 다녀왔는지 몰랐다.


 어느 날, 남자들이 몰려와 그녀의 횟집을 부쉈다. 무허가로 지은 거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채소밭에 나가 일하기 시작했다. 보따리 장사도 했다.

신평, 언양,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팔기도 하고 장날 길바닥에 물건들을 늘어놓고 팔기도 했다. 장사해 번 돈은 전부 엄마에게 주었다.


 쉰아홉 살. 엄마가 돌아가셨다.

엄마의 나이 여든두 살. 딸만 여섯인 집이라 작은아버지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고, 그가 엄마 제사를 지냈다.

여든세 살. 그녀는 술을 끊었다.
아흔두 살. 그녀는 담배를 끊었다.
아흔세 살. 그녀는 생일을 맞았다.
아흔네 살 생일은 돌아오지 않았다.


 김복동. 평생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진상규명을 위해 싸워온 투사이자 생존자.

수많은 미디어에서, 집회에서, 선언문에서, 그녀의 이야기는 이미 여러 번 들은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일본군 ‘위안부’ 시절에서 그들의 삶은, 그들의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김숨 작가에게,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김동희 관장은 김복동 님이 많이 편찮으시다고, 증언 활동을 누구보다 열심히 해온 그녀가 지금껏 들려주지 않았던 자신의 이야기를 끌어내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2018년 여름 증언집이자 소설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가 탄생했다. 그리고 두 계절 지나 올 1월, 김복동 님은 세상을 떠났다.


 자신의 삶을 구술한 책 속에서, 주체가 되는 것은 목소리의 주인뿐이다. 김동희 관장이 목소리를 통역하고, 이를 받아 적은 김숨 작가가 맥락이나 언어를 재구성했으나, 자신의 삶의 역사를 털어놓는 부정확하며 비논리적인, 유동하는 목소리는 오직 발화자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맥락을 얻는다. 증언이라는 사회적 발화 안으로, 일관된 서사 속으로 포섭되지 못한 중얼거림이 책에는 들어있다.


 미디어가 재현하는 제한된 이미지 속에서, 직접 살지 않은 시공간을 상상하는 일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는 지나치게 협소하다. 한 사람의 생이 우리에게 끼쳐올 때, 우리는 얼마나 귀를 기울일 수 있나.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라는데, 내가 나를”이라고 중얼거리는 한 사람의 못다 한 물음에 우리는 어떤 답을 찾을 수 있나.


 아무도 질문에 응답하지 않아 내가 나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그러하듯, 김복동 님의 자아는 여럿으로 나뉜다.

자신의 죄를 묻고, 종교에서 응답을 구하고, 전생을 추측하며,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를 자아의 분열이나 트라우마 같은 손쉬운 병리적 진단의 언어로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권명아 교수는 작품해설에 썼다.

 “홀로-여럿”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 자체가 그녀의 삶이자 역사이기에.


  <숭고함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야>를 통해 간신히 김복동 님의 삶의 이력을 맞추어 본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때때로, 그 이야기를 듣는 일 이외엔 아무것도 덧붙여 말할 수 없게 되는 일이다. 그녀의 지난한, 지나간 삶 앞에서는 오로지 듣는 일만이 가능하다. 간신히. 미약하게. 영원히 불충분하게.


*** 김숨 작가는 수 년 전부터 꾸준히 일본군 ‘위안부’의 이야기를 담고, 소설의 형식으로 알려 왔다. 수백 개의 증언이 담겨 있는, 일본군 ‘위안부’가 한 명밖에 남지 않은 상황을 상상해 쓴 김숨 작가의 장편소설 <한 명>, 일본군 ‘위안부’ 길원옥 님의 증언집 <군인이 천사가 되기를 바란 적 있는가>도 읽어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