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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전쟁 - 중국 상하이 지역 일본군‘위안부’의 귀환

  • 작성자연구홍보팀
  • 작성일2020-10-20
  • 조회935






[2020년 제2차 학술 콜로키움 - 끝났지만 끝나지 않은 전쟁: 중국 상하이 지역 일본군‘위안부’의 귀환]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는 지난 9월 28일 2020년 두 번째 학술 콜로키움을 진행했습니다. 콜로키움에서는 황선익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가 중국 상하이 지역 조선인 ‘위안부’ 관련 자료 연구결과를 토대로 해방 이후 현지 ‘위안부’ 피해자들이 처한 상황과 귀환 문제에 초점을 맞춰 발표했습니다.


이번 콜로키움에서는 코로나19 상황 속 참석자 간 거리 확보를 위해 참석 인원을 20명으로 제한하였고, 방역 수칙에 따라 안전하게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또한 화상회의 프로그램 ‘줌(Zoom)’을 통해 콜로키움 내용을 실시간 생중계하였습니다.


연구소는 올해 11월 20일, 2000년 여성국제법정을 주제로 좌담회 형식의 학술 콜로키움을 추가로 개최할 예정입니다. 2000년 여성국제법정 20주년을 맞이해 열리는 다음 학술 콜로키움도 기대해주세요!








 발표 1. 해방 후 중국 상하이지역 일본군‘위안부’의 집단수용과 귀환(황선익 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교수)


      1945년 해방이 됐을 때 과연 상하이 지역의 한인들은 얼마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고국으로의 귀환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에 초점을 맞추고 이번 발표를 준비했습니다. 전후 처리 상황에서 해방과 동시에 ‘한국인’이라는 국제적 지위가 보장되지 않았고, 타지에서 자유의지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는 당시 조선인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해방 이후 중국에서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영주권을 줄 수 있는 사람과 줄 수 없는 사람을 구분하면서 이들의 신원을 조회하는 과정에서 ‘위안부’였던 여성들을 색출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위안부’였던 여성들은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현지의 남성과 결혼하는 등의 방법을 택해야 했습니다.


   - 중국 국민정부의 귀환정책과 한인 여성의 현실

      중국으로 동원된‘위안부’들은 해방 이후 일본군‘위안부’라는 신분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 되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위안소 업자들과 함께, 혹은 개인적으로 거주지 인근 항구에 집결하여 1946년 이후 고국으로의 귀환을 시도했습니다. 중국 국민정부는 향후 중국에 거주할 수 있는 이들에 대한 ‘거류증’ 발급 규칙을 제도화하고 인구조사 및 이력조사를 통해 거주 허용 가능자에게는 거류증을 발급하고 거주 허용 불가능자는 ‘강제송환’했습니다.

 

   - 한국부녀공제회의 조직과 ‘위안부’ 수용의 실상

      한국부녀공제회는 결성 초기 대한요리집 ‘태평루’라는 장소를 거점으로 부녀자 27명을 수용하며 활동을 시작한 조직입니다. 한국부녀공제회는 활동 명분을 ‘위안부’의 보호와 갱생으로 내세웠으나 부녀공제회를 만든 김귀락, 공돈 등의 인물이 과거 위안소 업자였음이 밝혀졌죠. 처음 부녀자 27명 수용으로 시작한 부녀공제회는 점차 규모가 불어나 『수용인원명부』에 수록된 인원만 790명까지 확장되었고, 사용경비 역시 5,600만 원 이상으로 상당한 규모였습니다. 결국 ‘위안부’를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기부금과 예산을 받아서 자신들의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기만적 행동을 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 『귀국인명단(歸國人名單)』을 통해 보는 ‘위안부’의 귀환

      증언집 등의 자료와 『수용인원명부』, 『귀국인명단』, 『대한일보』를 교차분석하면서 알 수 있는 사실: 해방이 되고 조선으로 돌아가는 배가 있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위안부’들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실제 고향이 서울임에도 대전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다른 도시로 귀환함. 이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낙인과 편견 때문이기도 합니다. 귀환하지 않았거나 귀환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여러 가지 사연이 있었습니다. 중국 칭다오 위안소에 있다가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상하이 위안소로 가게 된 박우득은 다음과 같이 증언했습니다. “해방이 되고서 조선으로 돌아가는 배가 있었어요. 러시아 주인이 계속 잡는 거예요. 돌아가면 뭐 하겠냐며 붙잡는 거예요.” 결국 그는 귀환하지 못하고 ‘외국인 구락부’를 전전하다 2007년 중국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토론 1. 박정애 동북아역사재단 일본군‘위안부’연구센터 연구위원


   - 전후 귀환 과정에서 딜레마를 겪은 ‘위안부’

     ‘위안부’ 피해자들의 귀환은 당사자들에게 굉장한 딜레마였을 것입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살펴보면 ‘위안부’ 생활을 참을 수 있었던 이유로 “엄마를 만나야 해서, 전쟁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어서”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막상 귀환 일정이 정해지면 동요하기도 함. 수용소를 탈출해서 현지에 남는 경우도 있었고,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방랑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특히 집으로 돌아갔더라도 부모가 돌아가신 상태인 경우 다시 집 밖으로 나와 방랑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후 중국 등 현지 사회나 연합군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성병 감염원, 현지 풍기문란 유발자 등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고 싶어했습니다. 이를 감지한 ‘위안부’ 피해자들은 귀환선을 타기 위해, 혹은 현지에 남기 위해 있던 곳에서 탈출하기도 하고 현지 남성과의 결혼을 강요당하기도 했죠. 끊임없이 일탈된 존재로 감시를 받으면서 최선이 아니라 최악의 상황을 선택해야 했던 ‘위안부’들의 전쟁 이후 삶의 과정을 우리가 돌아봐야 합니다.


   - 한국부녀공제회와 『수용인원명부』의 성격

      피해자들은 전쟁 이후 ‘위안부’라고 하는 그룹에 묶이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단체 행동을 해서 눈에 띄기보다 익명화된 존재이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수용인원명부』가 만들어질 당시 ‘위안부’였던 이들이 얼마나 자신이 ‘위안부’였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을지 의문이 생깁니다. 실제로 ‘위안부’ 피해자 중 자신의 직업을 ‘위안부’였다고 말하기보다 노동자, 간호부, 가사사용인 등으로 대답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명부를 해석할 때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토론 2. 이선이 경희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전임연구원


   - 중국의 창기개조사업

     중국은 1947~1950년에 걸쳐 창기개조사업을 시행했습니다. 창기개조사업은 창기였던 이들을 해방시켜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남자들과 짝지어주는 사업으로 당시 중국의 창기개조사업과 맞물려 현지에 남게 된 ‘위안부’ 여성들도 대다수 결혼했을 것입니다.


   - 한국부녀공제회의 조사

     한국부녀공제회 설립 당사자인 공돈이 일본제국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전시 위안소를 경영했다는 지적은 식민지 이후 한국사에 제기되는 여러 문제 중 하나닙니다. 한국부녀공제회가 사용한 경비가 상당함을 미루어볼 때 위안소 업자들이 불법적으로 번 돈을 가지고 귀환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자금 세탁 용도로 한국부녀공제회를 조직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제기해봅니다. 일본군의 전후 처리 양상이 어땠는지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 후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자산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그 과정에서 일본군‘위안부’는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연구하고 논의할 수 있습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자료집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20년 제2차 학술 콜로키움 자료집은 [자료실]-[발간자료] 게시판에서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