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한 모든 여자들에게 (2021.3. vol.87)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이자영에 대해, From 황효진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니까.”
얼마 전, 한 지인을 무척 오랜만에 만났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요즘은 무엇을 재미있게 보거나 읽는지 등등의 화제를 거쳐, 일과 회사는 어떤지, 일과 관련한 고민은 없는지에 관한 대화로 흘러갔어요.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죠. 어떤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은 여성들끼리 남성에 관한 이야기만 한다고 짐작하는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잖아요. 그날 대화의 핵심은 성차별이 만연한 회사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지, 거기서 한 명의 여성이 분위기를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였습니다. 지인은 여성 직원에게 성희롱에 해당하는 농담을 하고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전혀 모른다는 한 회사의 이야기를 전하며, 이렇게 덧붙였어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니까.”
일은 일대로 하면서, 존재감이나 능력을 인정받지는 못하는 자영, 그러나 너무도 열심히 일하는 자영.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시대적 배경은 1995년입니다. IMF가 터지기 직전이에요. 삼진그룹에는 너무나 명백하게 계급이 존재합니다. 제일 위가 남성 대졸 사원, 그다음이 여성 대졸 사원, 제일 아래가 여성 고졸 사원이지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이자영(고아성)은 여성 고졸 사원입니다. “커리어 우먼”을 꿈꿨던 그는 삼진그룹에 입사함으로써 꿈이 이루어졌다고 외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자영은 엉망이 된 사무실에 아침 일찍 가장 먼저 출근해 쓰레기를 치우고, 커피를 타고, 온갖 서류 작업을 도맡습니다. 자영의 다른 고졸 사원 동료들도 마찬가지예요. 일은 일대로 하면서, 존재감이나 능력을 인정받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자영은 회사를 사랑합니다. 일도 좋아하죠. 좋아하는 만큼 열심히 하기도 하고요. 너무 열심히 일하는 자영의 모습을 보며, 저는 제가 만난 수많은 여성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기처럼 여성들을 감싸는 성차별
일하는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에서 일하는 동안, 회사 때문에 몸과 마음을 다친 여성들을 많이 만났어요. 직장인에게 회사란 들어가는 순간 모든 환상이 깨어지는 곳이라고들 하지만 여성에게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주 많은 조직에서 성차별은 공기처럼 여성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너무 미묘하고 자연스러워서 여성들 스스로 ‘내가 부족한 건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어요. 그럼에도 그토록 꿈꿔왔던 자리니까, 잘 해내고 싶어서, 돈을 벌고 살아나가야 하니까, ‘여자는 오래 못 버텨’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여성들은 성실하게 일합니다. 그럼 회사를 그만두는 여성들은 정말로 나약한 걸까요? 그건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한 적 없는 일과 회사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선택일 겁니다.
울면서 끝까지 싸우는 작고 작은 사람
노골적인 성차별과 학력을 기반으로 한 차별 속에서도 버티고 버티던 자영은, 회사가 페놀이 든 폐수를 방류해 주변 동네 주민들을 위험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괴로워합니다. 죽어가는 물고기를 보고, 오염된 사과를 보고, 오염된 물 때문에 몸 이곳저곳을 긁는 주민들을 볼 줄 아는, 눈 밝고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영은 사건을 공론화하고 동료를 모으고 어떻게든 해결해보려고 애써요. 밥줄을 위해서, 그토록 사랑하는 회사를 위해서 눈 감고 싶은 마음이 없진 않지만 그는 결국 그럴 수 없는 사람이라 울면서 싸웁니다. 가장 작고 약한 사람, 누구보다 쉽게 자신의 자리를 잃을 수 있는 사람, 그러니까 자영 자신의 표현대로 “tiny tiny person”이 끝까지 옳은 일을 하려는 이야기여서 저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며 같이 울 수밖에 없었어요.
혹시 자영의 이 말을 기억하는지 묻고 싶어요. “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이 일이 좀 의미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일이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면 좋겠고.” 1990년대나 지금이나 일하는 여성들이 바라는 건 결국 이것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하는 일의 의미를 나도, 동료도, 회사도 알아주기를. 최소한 내가 이 일을 함으로써 세상과 다른 사람들의 일상이 아주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와 내 일이 지워지지 않기를.
최근 저는 동료와 ‘기록’을 통해 여성들이 일의 의미와 각자의 전문성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도록 돕는 사업을 시작했어요. 저 역시도 저의 일이 “좀 의미가 있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고요. 영원히 풀지 못할 것 같은 문제들과 마주할 때마다 자영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해요. 그 얼굴은 사실, 제가 만났거나 아직 만나지 못한 수많은 여성의 것이기도 할 테니까요.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봄을 맞이하며,
황효진
작가 소개 [황효진] |
-더 나은 여성의 삶을 위한 콘텐츠팀 ‘헤이메이트’ 멤버 여성들의 커리어 상호성장 커뮤니티 ‘뉴그라운드’ 공동대표 자매애 고취방송 팟캐스트 [시스터후드] 운영 중 저서 [둘이 같이 프리랜서], [여자들은 먼저 미래로 간다], [여자들은 같이 미래로 간다], [일하는 여자들], [아무튼, 잡지], [나만의 콘텐츠 만드는 법] 前 엔터테인먼트 중심 온라인 잡지 [아이즈]와 [텐아시아]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