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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77호] 안전한 공동체는 가능할까

  • 작성자연구홍보팀
  • 작성일2020-03-25
  • 조회1539


일상속 현미경 여성혐오와 차별이 일상인 사회, 안전한 공동체는 가능할까 유진(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



여성혐오와 차별이 일상인 사회, 안전한 공동체는 가능할까


유진(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




나는 대학에 들어와서 각종 사회운동을 접하면서 점차 성별을 비롯하여 세상을 불필요하게 구분 짓거나 선입견을 가진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게 되었다. 동시에 대학교라는 공간에서 그리고 사회운동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함께일 때 나는 인간과 여성 중에 ‘여성’으로 구분될 필요도, ‘여성’으로서 인정받을 필요도 없었고, 나라는 존재 그 자체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각자가 동등한 인격체이고 인간인 사회,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지만 전혀 당연하지 않은 그런 사회의 가능성을 보았다. 어떤 차별도 없는 완벽한 공동체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서로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토론하며 해결해나갈 수 있는 믿음이 존재했고 또 이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서로의 규칙이 존재했기에, 언제나 미완성이지만 언제든 발전가능한 안전한 공동체라고 느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작년부터 나 자신을 사회에 내던지기 시작했을 때, 학업을 병행하는 동시에 경제적으로 어려워 발버둥치는 대학생으로 살게 되었을 때,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할 수 있다는 해방감은 온실 속에서 얻은 허상일 뿐인 듯 했다. 대학교 안에서, 운동사회 안에서 차별 없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실로 뛰쳐나온 나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나는 나대로 동등한 인격체이기 보다는 다시 ‘여성’의 위치에 놓여야 했다. 


아르바이트에서 남자 상사와 함께 일을 하게 된 첫 날 그는 “어디서는 여자애들이 공부만 해서 여자같이 보이지가 않았는데, 너는 괜찮은 것 같다”는 말로 고학력 ‘여성’으로서의 나를 ‘인정’해줬고, 근로 장학을 시작한 첫 날 내가 노트북이 고장 나서 없다고 하자 남자 직원은 화장도 안 한 나에게 “노트북에 화장품 쏟았구나”라는 말을 했다. 모든 여성에게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요구하고 대상화한 말을 칭찬으로 삼는 것이 당연한, 그러면서도 여성에게 강제되는 꾸밈노동조차 오점의 원인으로 삼아버리는 남성 중심적 시선. 지금까지의 고민과 실천이 무색하게, 평범한 사회에서 나는 이러한 시선 속에 묶인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자각해갔다.


요즘은 구시대적으로도 여기기도 하지만, 여성이라면 예뻐야 하고 여성이라면 분위기를 밝게 만들 줄 알아야 한다는 여성 혐오적 발상은 현실에서는 구시대의 전유물이 아닌 현재다. 근로 장학을 하는 사무실에는 남성 직원들뿐이었는데, 여기서 여성 직원의 필요성은 남성들뿐인 사무실의 칙칙한 분위기를 전환할 계기로서 언급됐다. 아르바이트 가게에서는 누구 외모 때문에 장사가 잘 된다는 식의 농담 아닌 농담이 오갔고, 사람들이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러오면 뒤에서는 “예쁘냐”는 질문과 이에 대한 평가가 아무렇지 않게 이뤄졌다. 내가 이런 분위기를 꺼림칙해하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별개로, 사회운동을 시작하면서 잊어 왔던 여성스러움에 대한 압박과 외모 콤플렉스가 의식의 수면위로 떠올라 나를 자극했다.


하지만 어떤 공동체 내에서 여성 혐오적이고 차별적인 발언이나 행동이 존재한다고 해서 해당 공동체가 혐오적이고 차별적인 공동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문제는 오히려 그 이후다. 공동체가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그리고 제도가 마련되어있는지의 여부 그리고 사건이 어떻게 문제로 제기되고, 어떻게 해결되는지의 과정들이 공동체의 성격을 규정한다. 내가 답답함을 느꼈던 지점은 오히려 이 부분에 있었다. 학생회가 작동하는 대학교가 아닌, 운동사회 내부가 아닌, 그 바깥의 현실은 너무나 괴리가 컸고 또 불안정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당연하게 남성중심적인 시선으로 사회를 보고 그 안에서 자신의 행동양식을 결정하게 되는 현실에서 이미 여성들은 문제제기의 가능성조차 인식하지 못했고, 나 또한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데이트 폭력이나 성폭력에 대한 얘기를 들어도 해결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없고 책임지고 사건으로 받아들여줄 제소할 기관이 없는 상황에서 내가 안일하게 나서서 당사자에게 해결과정의 짐을 짊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앞서 풀어낸 경험들은 누군가에게는 문제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평범한 일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혐오이자 차별이며, 특히 아르바이트를 비롯하여 경제적 문제가 함께 걸렸다면 더욱 피할 수 없는 문제다.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면서 이러한 일상을 바꿔내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폭력은 유 아니면 무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자라난다. 일상의 여성혐오와 차별을 없애지 못하면 이러한 인식에 기반한 폭력이 자라난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왜곡된 시선과 품평하는 언어들, 동등한 인격체이길 부정하고 여성의 가치를 낮추려는 시도들이 그 자체의 문제를 넘어서 여성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존재로 만들어 여성폭력을 낳는다. 운동사회 내부에서도 평가와 반성이 쉽게 이뤄지지는 않기에, 여성혐오를 정당화하고 차별에 대한 문제제기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를 바꿔나가는 일은 더욱 어렵다. 하지만 그만큼 여성에게 보다 안전하고 성차별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에 대한 필요성이 크다.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들이 무기력에 빠지지 않도록, 이런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넓혀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