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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저는 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 최영미 시인 -

  • 작성자시스템관리자
  • 작성일2019-02-26
  • 조회197

2월15일의 판결을 기다리며 글을 씁니다. 지금 제가 쓰는 이 글이 한국여성인권진흥원의 홈페이지에 실릴 즈음이면, 원고인 고은태가 제기한 손해배상소송의 판결이 나와 있을 겁니다. 참 길고도 지루했던 싸움의 끝이 보이네요. 여러분의 지지와 응원이 없었다면 저 혼자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그처럼 상습적인 성추행 가해자가 다시는 피해자를 상대로 뻔뻔스레 소송을 걸지 못하게, 확실하고도 완전한 승리를 저는 원합니다. 


 돌이켜보니, 이 모든 게 ‘괴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2017년 가을에 시 ‘괴물’을 황해문화 편집부에 보낸 뒤에 저의 가장 큰 걱정은 문인들이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침묵으로 일관하면, 나의 발언은 거짓이 되고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 시를 쓸 즈음, 헐리우드에서 미투가 시작되었고 원고를 보낸 2017년 10월 중순에는 한국 언론에서도 미국의 미투를 비중있게 보도했지요. 서검사의 미투 이후에 제 시가 재조명되었고 ‘괴물’에 대한 뜨거운 반응에 놀랐습니다.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응원을 보내주셨습니다. 요즘 길거리에서, 버스에서, 전철에서 여성들이 제게 다가와 ‘힘 내세요.’ ‘응원합니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버스에서 내리다 앞좌석에 앉은 저를 알아보고 버스가 떠나려 하는데도 제 손을 놓지 않아, 다칠 뻔한 여성분도 있었습니다. 그분들을 보며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더 잘 싸워야겠구나.’라고 생각하며 기운을 냈습니다.  
문단의 반응은 엇갈렸습니다. “문단 전체를 성추행 집단으로 매도했다”며 저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의 발언을 지지하며 연대감을 표시한 문인들도 있었습니다.  


 선배 여성시인 M은 “사방에 얼음장 깨지는 소리가 경쾌하다"며 공개적으로 저의 미투를 지지했고, “en시인과 함께 방송을 진행하며 그의 여러 우스운 만행들을 접했고 ‘en 주니어’들이 넘쳐나는 한국 문단에서 오래 성희롱을 겪어왔다” 고 감히 고백한 젊은 여성시인도 있었습니다. 작년 이맘때 문단 내 성폭력과 갑질 근절을 위한 국회 토론회에 나가 용감하고 예리한 발언으로 문단 성폭력 문제를 널리 알린 문인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를 표합니다.


 미투에 힘을 보태준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의 문인들은 침묵했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지요. 이십여년 전에 저를 성추행했던 시인 L은 sns에 저를 비방하는 글을 올리며 앞장서서 저를 공격했습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생각한 거죠. 글 좀 쓴다는 지식인들도 예외가 아니어서, 시대착오적이며 봉건적인 윤리관에 갇힌 어떤 남자시인은 “괴물과 퇴물”이라는 댓글을 달아 저를 모욕했습니다. 퇴물이라니. 저를 나이든 기생 취급한 거죠. 


 한국문인들은 자신을 등단시킨 잡지, 편집위원이자 교수이자 평론가이며 심사위원인 문학권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괴물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를 키운 문단의 높은 분들이 두려워 문인들이 증언을 꺼리고 있지요. 그들의 눈 밖에 나면 문학상도 못타고, 유력 출판사에서 신간을 출간하지 못할지도 모르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지요. 괜히 정의감에 나섰다가 잃을 게 많기 때문에 몸을 사리는 겁니다. 


 진실을 말한 댓가로 저는 소송에 휘말렸습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을 무고죄로 고소하거나 이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건 한국에만 있는 독특한 현상입니다. 2018년 2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 회의에서 루스 핼퍼린-카다리 부의장은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을 무고죄로 고소하거나 이들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거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이는 모든 피해자를 침묵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제가 그의 성추행을 폭로한 이후 기업체로부터 강의요청이 끊겼고, 이미 잡힌 강의도 취소되었습니다. 서울의 대학에서 ‘시 창작’ 강의를 하기로 했는데, 제가 손해배상소송을 당하자 개강 일주일을 앞두고 강의가 취소되었습니다. 강의 취소는 처음 당하는 일입니다.
 고소당한 뒤에, 저는 외로웠습니다. 그를 고발한 2월에 저를 지지하는 글을 올린 문인 두 명이 글을 내렸고, 작가회의는 침묵했습니다. 어떤 시인은 제 전화를 받지 않아, 증거 수집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저처럼 억울한 피해자가 다시 생기지 않기를 빌며,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합니다.


 1. 역고소 등 2차 피해를 막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시민사회단체만 아니라 정치인들이 나서서, 정부 차원에서 2차 피해를 방지하는 실효성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합니다.

 2. 재판절차가 길고 복잡해, 사회적 약자인 피해자들은 소송을 당하면 일상이 엉망이 되고 법을 몰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합니다. 길게는 3년씩이나 끄는 재판을 받는 동안 생활비도 막막한 피해자가 많습니다. 

법정이 아니라 ‘성폭력 조정위’ 같은 기구를 만들어 진실을 가리면 좋겠습니다. 국가인권위, 여성가족부, 시민단체들이 참여한 성범죄 조사단이 사건을 조사해, 빠른 시일에 (6개월 이내에) 결론을 내도록 합시다. 가벼운 성범죄일 경우, 시민배심원단을 구성해 인터넷으로 판결을 내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3. 성폭력피해자들이 역 고소를 당했을 때, 이들을 지원하는 법률 지원금의 액수를 늘려야 합니다. 

 4. 성추행, 성폭행의 공소시효를 없애야 합니다. 성추행의 공소시효를 없애거나, 현행 5년에서 30년으로 연장해야 합니다. 성폭력은 피해자의 신체만 아니라 정신을 망가뜨리고, 인격을 살해하는 중대한 범죄이니 살인처럼 성범죄도 엄격히 처벌해야 합니다.

 5. 성폭력을 당하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사례집을 만들어 널리 배포하고, 성폭력을 예방하는 교육이 가장 중요합니다. 초·중·고교에서부터 젠더 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교과과정을 구성하고, 현장에서 적절한 실습과 지도를 병행해야 합니다.


*
 그의 성추행을 말한 뒤, 제 인생이 변했습니다.
 혼자 지내기 좋아하던 제가,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광화문 광장에서 정의와 평화를 외쳤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정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혼자가 아닙니다. 제 옆에, 제 뒤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응원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거짓말을 덮으려 저를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저를 음해하려 계략을 꾸미고 있지만, 제 입을 막지는 못합니다. 저는 말하기를 멈추지 않을 겁니다.
 여성들이 한번 말하기 시작하면 아무도 말리지 못합니다. 한국 속담에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잔이 깨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네. 접시잔도 깨고 술잔도 던져서, 저항합시다. 돈과 권력에 기대어, 습관과 관행의 힘으로 약자의 성을 착취하던 시대를 우리 손으로 끝장냅시다. 


- 2019년 2월13일 최영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