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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76호] 페미니즘 문화읽기 - 윤이형 <붕대감기>

  • 작성자진흥원
  • 작성일2020-02-25
  • 조회766


페미니즘 문화읽기 흰 붕대를 감듯 이어달리는 여성들의 이야기 윤이형 <붕대감기>




흰 붕대를 감듯 이어달리는 여성들의 이야기 

윤이형 <붕대감기>





유튜브 '채널 수북' 운영자 '리외'



2005년 데뷔 후, 꼬박 15년 간 ‘문학장’ 안에서 활동하며 존재해왔다. 그리고 얼마 전, 더 이상 기성 문단에 작가로서 글을 발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윤이형 작가의 이야기다.


이른바 ‘이상문학상 사태’가 있었다. 1월 초 김금희 작가를 시작으로, 2020년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 작가로 선정된 소설가들이 수상을 거부했다. 수상작의 저작권을 3년간 출판사에 양도해야 하며, 향후 해당 작품을 소설집에 실을 경우 표제작으로 삼을 수 없다는 요건 등 문학사상사의 불공정한 요구에 반발한 것이다. 불과 1년 전, 2019년 대상 수상자였던 윤이형 작가는 동료들이 문제제기하는 모습을 보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지난 1월 31일, “상에 대해 항의할 방법이 활동을 영구히 그만두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결정을 내렸다”고 윤이형 작가는 썼다. 이에 동료 작가들은 지지와 공감을 표하며 업무 및 청탁 거부, 보이콧 운동에 나섰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지던 부당한 절차들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작가들은 대부분 젊은 작가들, 특히 여성 작가들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다가, 무언가를 하니까 또다시 당신은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 건 연대가 아니야. 그건 그냥 미움이야. 가진 것이 다르고 서 있는 위치가 다르다고 해서 계속 밀어내고 비난하기만 하면 어떻게 다른 사람과 이어질 수 있어? 그리고, 사람은 신이 아니야. 누구도 일주일에 7일, 24시간 내내 타인의 고통만 생각할 수 없어. 너는 그렇게 할 수 있니? 너도 그럴 수 없는 걸 왜 남한테 요구해? (<붕대감기> 108-109쪽)


<붕대감기>는 올해 1월 출간된, 윤이형 작가가 남긴 마지막 책이자 중편소설이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모두 여성이며, 직업과 계층, 성격과 지향, 나이 등이 각기 다르다. 여성이라는 공통점 외엔 서로 그다지 닮지 않은 셈이다. 어쩌면 이들은 살면서 서로를 그다지 마주칠 일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는 바통 터치하듯 이어진다. 


무탈하고 안온해 보이는 미용실의 어느 오후로부터 시작해(‘해미’), 일순간 의식불명이 된 어린 아들로 인해 삶이 완전히 변해버린, 그래서 그 미용실에 8개월째 오지 못하고 있는 워킹맘 이야기로(‘은정’), 미용실 직원으로 일하며 탈코르셋 운동과 꾸밈노동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20대 여성의 이야기로(‘지현’), 젊은 시절 여러 이유로 인기가 많았던 동시에 남성들의 성추행과 성희롱을 무수히 당했으나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이자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40대 여성의 이야기로(‘진경’), 그런 그녀를 바라볼 때 질투와 시기를 자꾸만 느끼는, 그러나 가장 힘겨울 때 계속 그녀를 생각하는 오래된 친구의 이야기로(‘세연’)...... 


짧은 에피소드들이 제시되면서 여성들이 겪는 다양한 층위의 차별과 폭력, 미처 폭력이라고 인지하지 못했던 미세한 수준의 모멸감까지 자연스레 드러난다. ‘진경’과 ‘세연’이라는 40대 여성의 이야기로 옮아온 뒤, 이야기는 그 둘을 중심으로 다시 뻗어나간다. 그 핵심에 놓인 사건이 바로 고등학교 교련 시간 붕대감기다. 


모두가 좋아하던 ‘진경’과 모두가 싫어하던 ‘세연’은 우연히 붕대 감기 시간에 파트너가 된다. ‘세연’은 자신의 외모가 혐오스러워 화장을 하고 다녔고, 그래서 따돌림을 당했다. 이번에도 혼자겠지, 여기던 ‘세연’에게 누구보다 인기 많은 ‘진경’이 다가와 함께 붕대 감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규칙을 따라 한 사람의 머리에 붕대를 둘러주는 것이었다. ‘세연’은 자신에게 누군가 다가왔다는 사실 때문에 너무 놀라고 당황해 ‘진경’의 머리에 붕대를 한 바퀴 더 감아버리게 되고, 매듭 짓기에 지나치게 짧아진 붕대를 힘껏 당기다가 ‘진경’이 비명을 지르게 된다. 이상하게도, 그 사건은 20여 년이 지난 뒤에도 두 사람의 머릿속에 내내 남아있다. 


이야기 속 여성들은 어렴풋 알고 있다. 불법촬영 범죄 대항 시위를 전후해 젊은 여성들이 느끼는 분노와 수치, 깨어나지 않는 아이를 두고 출근해야 하는 워킹맘의 자괴, 커리어를 잃고 가정주부로 살아가는 여성의 공허감, 비혼 여성 페미니스트로 스스로 정체화하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자기검열과 비교의식에 시달리는 중년 여성의 분열 등, 혼란스럽고 미묘하게 불쾌하며 때로는 한없이 외로운 여성들, 그들에겐 스스로 감아줄 붕대가 부족했다는 것을. 그래서인지 ‘진경’은 잠든 딸의 이마를 쓸어주며 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히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붕대감기> 68쪽) 


사태가 커지자, 문학사상사 측에서는 이상문학상 관련 저작권 3년 양도 규정을 삭제하고, 올해 이상문학상 수상자는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윤이형 작가의 절필 선언은 이상문학상 사태 비판에 그치지 않았다. 예술가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예술인 권리보장법안’의 신속한 국회통과 촉구, 문화예술계 내 성폭력 사태에 대한 환기와 비판 등 자신이 몸담았던 구조를 개혁하기 위해 누구보다 크게 목소리를 내고 있다.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과 문단 내 성폭력 폭로 이후, 윤이형 작가는 스스로를 ‘페미니즘에 입문한 여성 작가’로 규정했다. 그 이후 발표한 작품들은 확실히 준거집단을 여성으로 두며, 여성들의 고민과 서사를 첨예하게 보여준다. 


독자로서, 그의 작품과 그의 행보가 닮아 있다는 생각에 자연히 이르게 된다. 실제로 윤이형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기본적으로 제 이야기를 많이 쓰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다. 타인이어도 자신과 닮은 면이 있는 사람들을 주로 써왔다고.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누가 저 이야기를 좀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하고 싶은 얘기는 거의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에요.” 


누가 저 이야기를 좀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더 나아가 이제는 자신이 직접 목소리를 내고 있는 한 사람. 그럼에도 우정과 연대라는 단어를 끝내 놓지 않은 사람. 붕대감기 실습에서처럼 미숙하지만, 그래서 갈등하고 서로를 아프게 하더라도 결국은 여성들의 우정과 연대, 즉 타인과의 관계를 되묻게 하는 사람. 그의 작품을 더 이상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리다. 


마음을 끝까지 열어 보이는 일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고 무참하고 누추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더 많지만, 실망 뒤에 더 단단해지는 신뢰를 지켜본 일도, 끝까지 헤아리려 애쓰는 마음을 받아본 일도 있는 나는 다름을 알면서도 이어지는 관계의 꿈을 버릴 수는 없는 것 같다. - <붕대감기>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