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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75호]<전문가칼럼> 강간죄,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개정해야 하는 이유

  • 작성자진흥원
  • 작성일2019-11-27
  • 조회784



강간죄,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개정해야 하는 이유 1)


박아름(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지난 11월 12일, 의정부지법 고양지원 형사1부(전국진 부장판사)는 채팅 어플을 통해 만난 여성을 강간한 남성 피고인에게 강간죄는 무죄, 음주운전은 벌금 200만원을 선고했다. 피고인이 “피해 여성의 의사를 무시하고 성관계를 한 것은 인정되”지만 “피고인이 상대방의 반항을 현저하게 곤란하게 할 정도로 폭행·협박하지 않았다”라는 이유였다.2)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는 성관계가 곧 강간이라고 보는 대중 인식과는 상반되는 판단이었다. 어떻게 이런 판결이 가능했을까?


 현행 형법 제297조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를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법조문에 따르면 사람을 강간한 자 중에서도 폭행 또는 협박으로 강간한 자에게만 유죄를 선고할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최협의설’이라고 불리는 폭행·협박 판단 기준이다. 그동안 판례는 ‘상대방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가장 협소한 의미의 폭행·협박이 있는 경우에만 강간죄로 인정했다.


 성폭력을 매우 좁게 처벌하는 현행법과 판례는 피해자의 동의 여부보다 여성의 ‘정조’ 유무가 더 중요했던 가부장적 인식에서 출발했다. 1953년 대한민국 형법이 제정되었을 당시, 성폭력 범죄를 규정하는 형법 제32장의 제목은 ‘정조에 관한 죄’였다. 당시 입법자들은 성폭력의 보호법익을 여성의 ‘정조’라는 성차별적 관념 자체로 바라보았다. 피해자는 ‘부녀’ 즉 여성으로 한정되었다. 1970년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법률상 아내는 포함되지 않았다. 대법원 판례는 2013년 5월에야 법률상 아내도 강간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과거 성폭력 관련 법과 판례를 보면, 피해자의 인권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여성은 언제나 ‘목숨보다 소중한 정조’를 지킬 일차적인 책임을 강요받았다. 법은 여성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유로 ‘정조’라는 가치가 훼손된 경우에만 가해자를 처벌하고자 했다. 성폭력 피해자는 죽도록 저항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몸가짐을 잘못해 성폭력을 유발했다는 이유로, ‘음행에 상습이 있어서’ ‘보호할 가치가 없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비난을 당하기 부지기수였다. 심지어는 법원이 성폭력 피해자를 가해자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피해자가 가해자와 결혼하면 결과적으로 ‘정조’라는 가치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성폭력의 개념과 보호법익은 완전히 변했다. 1994년 성폭력특별법이 제정되었고, 1995년 형법 제32장의 제목이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었다. 2013년 6월 13일에 시행된 형법 개정은 피해자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확대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성폭력을 ‘성적 자유 또는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죄’라고 말한다. 대법원 판례는 “‘성적 자유’는 적극적으로 성행위를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소극적으로 원치 않는 성행위를 하지 않을 자유를 말하고,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행위를 할 것인가 여부, 성행위를 할 때 상대방을 누구로 할 것인가 여부, 성행위의 방법 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한다. 또한, 설령 사전에 성관계에 동의했다 하더라도 “피해자는 여전히 그 동의를 번복할 자유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상하지 않았던 성적 접촉이나 성적 행위에 대해서는 이를 거부할 자유”를 가진다(대법원 2019.6.13. 선고 2019도3341 판결 참조).


 미투 운동은 그동안 켜켜이 쌓여온 사회적 변화를 혁명으로 드러냈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수많은 시민들이 ‘미투 이전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외쳤다. 용기 있는 피해자들의 말하기는 성폭력이 성적 자유 또는 성적 자기결정권뿐만 아니라 피해자의 인격권, 존엄성, 성과 재생산 권리, 신체의 자유, 개인의 안보, 평등권, 행복추구권, 생존권, 직업의 자유, 종교의 자유, 교육받을 권리 등을 모두 아우르는 문제임을 알렸다. 이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의 법, 제도, 문화, 인식, 규범, 교육, 담론 등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9년 1월부터 3월까지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를 통해 전체 66개 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강간(유사강간포함) 상담사례들을 살펴본 결과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사례 총 1,030명 중 직접적인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피해사례는 71.4%(735명)에 달하고,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행사된 성폭력 피해사례는 28.6%(295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성폭력 관련 법 규정은 여전히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만 처벌하는 구시대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 현행법은 성폭력 피해자의 경험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성폭력 가해자가 무고, 명예훼손 등 보복성 역고소를 남발하도록 힘을 실어주는 부정의를 만들어내고 있다.


 국제 사회는 이미 ‘동의’ 여부를 기준으로 성폭력을 재정의하는 추세다. 국제형사재판소와 유럽인권재판소와 같은 국제재판소들은 모두 ‘동의’ 여부에 따라 강간죄 성립 여부를 판단하고 있다. 해외 각국 입법례를 보더라도 영국, 스웨덴, 독일, 아일랜드, 캐나다, 호주, 미국(11개주) 등 여러 선진국들은 이미 ‘피해자의 의사에 반한’ 또는 ‘동의 없는’ 등을 구성요건으로 강간죄를 규정하고 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는 2018년 제8차 한국정부 심의 결과 “형법 제297조를 개정하여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의 부재를 중심으로 강간죄를 정의”하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미투 운동 이후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하거나 비동의간음죄를 신설하는 10개 형법개정안이 5개 정당 의원들의 대표발의로 발의되었다. 209개 여성인권단체와 전문가들로 구성된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는 형법 제297조를 개정하여 성폭력 판단 기준을 ‘폭행 또는 협박’에서 ‘동의’ 여부를 중심으로 규정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비동의간음죄를 신설할 경우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의 경험을 ‘강간은 아니다’라고 일축하는 결과를 낳고, 기존에 강간죄로 처벌하던 성폭력 사건마저도 비동의간음죄로 축소해 처벌할 우려가 있다. 지난 11월 13일에는 국회의원회관에서 20대 국회 강간죄 개정을 위한 토론회를 진행하여 구체적인 법안 논의를 하기도 했다. 국회는 더는 법 개정을 미루지 말고, 성폭력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대적 요구에 하루빨리 응답하기 바란다.




1)  이 글은 2019년 9월 18일 ‘강간죄’개정을위한연대회의에서 진행한 기자회견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로 개정하라!> 발언문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강간죄 구성요건을 ‘동의’ 여부로 개정하라”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2) 로톡뉴스, 2019년 11월 15일자, [단독] 접시에 고기 덜어준 '호의'를 성관계 '동의'라고 해석한 법원, https://news.lawtalk.co.kr/judgement/1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