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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73호]<페미니즘 책으로 읽기> 여성-서사-릴레이 : 「벌새」를 읽고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2019-09-25
  • 조회254



여성-서사-릴레이 : <벌새>를 읽고


9페미니즘, 책으로 읽기서평 (리외, ‘채널 수북운영자)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나는 장면이 있다. 매번, 어김없이, 기어이 나를 울게 하는 장면들로부터 끝내 눈을 떼지 않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않은 채 그 이미지를 바라볼 때, 나는 내가 그 장면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실은 어쩌면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도망치지 않고 그 장면을 응시하고 싶다는.

 

영화 <벌새>를 만든 김보라 감독도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심리학 용어 미해결 과제(unfisnished business)’라는 단어를 꺼낸다. 중학생 때의 일들이 미해결 과제처럼 남아 있다고 느꼈고, 그 시절과 건강하게 안녕하고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다고. 30대를 온통 바친 이후에야, 김보라 감독은 이제 그 챕터를 끝낸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일상을 짐짓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고, 이따금 어른 행세를 하기도 하며, 어린 시절보다 좀 더 세련되었거나 성숙했다고 여겨지는 순간들이 물론 있겠으나,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은 과거가 마치 꿈처럼 우리 의식 저변에 깔려 있다. 그래서인지 무삭제 시나리오와 비평, 대담이 담긴 동명의 책 <벌새>의 부제는 닫히지 않은 기억의 기록이다. 기억이 닫히지 않았기에, 어떤 장면들을 통해 계속해서 환기될 수밖에 없다.




2015년부터 근 2년 간, ‘하자센터(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의 토요학교에서 강사로 청소년을 만났다. 청소년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손으로 써보고, 그 이야기를 사연의 형식으로 구성해 서너 명이 한 팀이 되어 라디오 방송을 만들어보는 라디오하자라는 수업이었다. 수업마다 한두 명은 빼곡하게 종이를 채웠다. 나의 닫히지 않은 기억들을 그 이야기들이 담고 있었다. 주변의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했던 비밀, 상처, 고민들을 직접 쓰고, 그것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이해하는지 들어보는 경험이 그들에겐 중요했다.

 

같은 반 친구들이 저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엄마가 자꾸 공부하라고 하는데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요 어떡하죠, 아빠가 자꾸 저를 때려요, 저는 커서 동물들을 치료해주는 사람이 되고 싶은데 선생님은 자꾸 공무원이 되어야 한대요, 오빠가 죽을 만큼 싫어요, 제일 친한 친구랑 싸웠는데 화해할 수 있을까요, 좋아하는 애가 생겼는데 다른 학교라서 잘 만날 수가 없어요 이럴 때 어떻게 하면 될까요......

 

10대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납작해지는 이유는 그들의 그 시절 고민들, 이야기들이 어른들도 언젠가 다들 해봤던 경험이라 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1초에 90번이나 날갯짓을 하지만, 아무도 그 날갯짓을 유심히 보아주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새, 벌새처럼.

 

그러나 그들의 시점에서 그들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기묘하고, 이해할 수 없고, 어렵고, 어지럽고, 심각하고, 공포스럽고, 모호하고, 낯설고, 수치스럽다. 그들은 사랑하고, 상처받고, 자신의 삶 속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한다. 마침내 어느 한 순간, 세상이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찰나를 만나게 되기까지.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영화 <벌새> 영지의 대사)




<벌새>는 단 한 번도 진지하게 다뤄진 적 없던, 철없고 유치하고 뭣 모르는 시절이라 치부해온 이야기를 진지하게, 하나하나 펼쳐 놓는다. 철저히 열다섯 은희의 시선에서 바라보기에 그것이 가능하다. <펀 홈><당신 엄마 맞아?> 등의 작품을 쓴 만화가이자 벡델 테스트를 만든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은 김보라 감독과 대담을 나누며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한 소녀의 삶을 의미 있고, 소중하게 그리고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었던 것 같다. 소녀의 삶 역시 인간의 삶이며, 폄하될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대서사시(epic)라는 말로 표현해야 할 것 같다. 온전한 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느껴졌다. (...) 여성들은 항상 외부 시선으로 관찰된다. 당신은 여성 캐릭터를 내부자로서 조명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은희가 대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녀는 영화의 주체였다.” (<벌새> , ‘여성, 서사, 창작에 대해 ? 김보라+앨리슨 벡델’)

 

별 일 없어 보이는 평범한 한 소녀의 일상.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면마다 무언가 들끓고 있다. 수많은 사건이 안팎에서 벌어지고, 수많은 감정이 오간다. 눈빛과 침묵만 존재하는 장면들에서도 우리-관객이 어떠한 긴장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주체인 은희의 입장과 대등하게 서있기 때문이다. 이 소녀에게 마땅히 존재하는 존엄성과 지위를 우리도 함께 느끼기 때문이다. 반드시 치명적인 사건이 발생하지 않아도, 극적인 드라마가 존재하지 않아도, 가장 디테일한 묘사와 섬세한 장면 제시만으로 가장 보편적인 차원으로 도약하는 서사. 그것이 <벌새>라는 영화-이야기다.

 

이야기로서 <벌새>가 지니는 가치는 여럿이겠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두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는, 우리(여성)의 유년에 관한 기억은 닫히지 않았기에 어떤 원형적인 이미지들로부터 계속해서 환기되며, 그 장면들이 우리를 울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새삼스레 깨닫게 하는 것. 또 하나는, 그리하여 우리 각자의 유년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말하게 된다는 것. 발화함으로써 그 시절과 화해를 도모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발화하게 된다는 것.

 

영화를 보고, 책을 통해 시나리오를 읽고, 무엇보다 무수한 관람평과 후기를 읽었다. <벌새>를 본 관객들, 책과 감독 인터뷰를 읽은 독자들에게서 가장 많이 발견하게 되어 놀라웠던 지점은 바로 나의 이야기를 꺼내는 빈도와 밀도였다. 수많은 여성들이 은희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 년, 수십 년을 지나온 자신의 유년 이야기를.

 

하자센터에서 내가 만난 10대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다시금 떠올린다. 보잘 것 없다고 간주되어 온 자신의 이야기도 특별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깨닫는 것만 같던 소녀들의 눈빛. 그런 눈빛들은 영영 잊히지 않는다.



 

좋은 이야기는 수많은 해석과 수많은 들을 소환하는 이야기다. 너무도 구체적이고 주관적이라 오히려 ‘(그래, 아니, 맞아.) 나는 이랬지생각하게 하는 이야기. 영웅적인 여성, 논쟁적인 여성, 근사한 여성, 저항하는 여성 등 수많은 여성 동료들이 우리 곁에 있지만, ‘를 꺼내놓게 되는 지극히 사적이며 비밀한 여성 서사를 도리 없이 가장 사랑하게 된다. 그런 이야기는 그들을 동경하고 응원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로 돌아와 를 보듬고 응원하게 하기 때문이다.

 

많이 울고 나서, 입을 열어 우리 각자의 이야기를 하게 하는 힘. 그것이 좋은 이야기의 힘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여성들의 서사는 계속된다.

 

나는 어떻게든 이 이야기를 나만의 이야기가 아닌, 원형적 서사로 만들려 했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서 깨달은 것은 깊숙이 내 이야기인 것은 결국 다른 이의 이야기가 된다는 당연한 결론이었다. 가장 구체적일수록, 그것은 가장 보편적일 수 있다는 것을. (<벌새> ‘작가의 말중에서)


* 한국의 독립영화2: <벌세> 김보라 감독 ? 그 시절의 나에게, 지금 10대들에게 보내는 위로 (2019.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