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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72호]<전문가칼럼> 꽃으로 다시 피어날거예요. - <주전장>과 <김복동>을 다시 읽는다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2019-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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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다시 피어 날거예요.

-<주전장>과 <김복동>을 다시 읽는다



김윤아(영화평론가)

   

 

‘빈들에 마른 풀 같다 해도 꽃으로 다시 피어 날거예요.
누군가 꽃이 진다고 말해도 난 다시 씨앗이 될 테니까요.
그땐 행복할래요, 고단했던 날들 이젠 잠시 쉬어요. 또다시 내게 봄은 올테니까...'




윤미래가 부르는 영화<김복동>의 주제곡 첫 소절을 듣다가 울컥 그만 눈물이 고인다.

영화에 관해 글을 써야하는데 영화 주제가를 들으며 눈물부터 쏟고 앉아있다. 하기야 할머니들의 복기하기도 힘겨운 고통과 소녀들의 작고 순진한 결의 앞에서 어찌 객관성과 비평의 거리를 유지하겠는가.

이 땅에서 여자로 나고 자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흐르는 눈물을 참기는 쉽지 않다. 여자들뿐이랴, 누이와 여동생이며 어머니이자 할머니인 그들의 아픔은 이 땅의 모든 이에게 나라 잃은 아픔이 몸으로 각인된 씻을 수 없는 상흔인 것을.



지난 봄 김복동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잊을만하면 한 번씩 도발하는 일본 정부 우익인사들의 망언이 극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곧이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와 함께 시작된 노 아베 구호와 일본제품 불매운동이 들불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반일종족주의』나 『제국의 위안부』같은 종류의 책들이 대중적 논란의 중심에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잊은 사람들의 논리였다.

그 와중에 위안부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루지만 성격은 조금 다른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2주일의 시차를 두고 개봉했다.

7월 25일에 <주전장>, 8월 8일에 <김복동>. 이 두 편의 다큐멘터리는 마치 중심과 균형을 잡으며 날갯짓을 해야 잘 날 수 있는 새의 두 날개 같은 한 쌍이라는 생각을 했다. 



<주전장>은 일본계 미국인인 미키 데자키 감독이 관련 자료와 인터뷰를 중심으로 위안부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잘 보여준 영화다.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감독은 우리처럼 할머니들의 고통에 감정적으로 동일시하거나 동요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일본의 극우 세력, 역사수정주의자들과 ‘위안부는 적법하고 강제가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한국 학자들, 미국내 일본 극우의 논리를 선전하는 것으로 호구지책을 삼는 ‘텍사스 대디’와 같은 기회주의자들의 논의까지 거리를 유지하며 편견없이 보여주고자 노력한다.

논리적으로 자기모순에 빠지기도 하는 그들의 발언에도 감독은 질문을 던질 뿐 자신의 심중을 드러내지 않는다. 판단은 관객의 몫이다.



 아베수상을 필두로 일본 극우 정치인들의 근거 없는 혐한 발언과 망발은 오히려 관객들로 하여금 어이없는 쓴웃음을 짓게 만들면서 동시에 그 집요하고 사악한 시도를 재인식할 수 있도록 끌어간다.

자신들의 치부가 되는 역사라면 조직적으로 왜곡하고 가짜 뉴스들을 역사화하면서 전범국가로서의 책임을 회피하고 발뺌하려는 일본 극우 세력의 속셈을 알아차리게 만든다.
그들 망발의 기저에는 재무장을 위한 개헌 의지와 군국주의 노스탤지어가 웅크리고 있는 것 같다. 심지어 한국은 ‘응석과 어리광을 피우는 귀여운 나라’라며 대놓고 깔보는 황망한 언사들은 일본 극우의 과거 식민지를 대하던 오만불손한 제국주의적 태도를 연상시켜 보는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다.



공개된 자료와 통계를 제시하며 감정적인 동요 없는 미키 감독의 객관적 시선은 오히려 인종차별, 성차별, 군국주의 파시즘과 같은 여러 층위에 걸쳐있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양식있는 일본의 학자와 전문가들의 의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를 대하는 일본 정부의 조작적 역사인식과 안하무인적인 태도는 그들이 맞이할 앞날을 짐작하게 한다.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는 당사자인 할머니들에게 너무 냉정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주전장>이 설득력을 강하게 지니는 영화가 될 수 있었던 것 같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분노하고 감정적으로 공명하게 하는 측면은 곧이어 개봉한 영화 <김복동>(감독 송원근)에서 해소된다.   




영화<김복동>은 일본 정부에게 진심어린 사과를 받고 진실을 만천하에 밝혀 명예회복을 하고자 하는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다룬다.

영화는 미래에는 이런 비극이 다시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할머니와 동지들의 의롭고 외로운 싸움을 밀착해서 보여준다. 평생을 쉬쉬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아온 할머니들이 세상 밖으로 나서며 시작된 전쟁 범죄의 폭로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죽을 때까지 숨기고 싶은 이야기였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일본의 사과를 받기 위해 세상으로 나선다는 것은 사랑하는 가족 친지들과의 사이에 거리가 생기고 마는 용기 있지만 힘겹고 고독한 여정을 시작한다는 의미였다.



전쟁의 명백한 피해자였음에도 한국 사회의 유교적 가부장적 순결주의는 살아 돌아온 어린 소녀들이 당한 일을 개인의 치부로 감수하기를 요구했고 할머니들 스스로도 그것을 수치로 여겨 차마 내보이지 못하며 살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당사자로서 위안부 인권운동을 하기로 나선다는 의미는 가족을 버리고 안락한 삶을 떨치고 나와 차가운 눈벌판으로 막막하게 나서는 길이었던 것이다.

 힘없는 식민지 소녀들이 속아서 끌려간 후 전쟁터에서 밤마다 삶과 죽음을 넘나들며 느꼈을 치욕과 고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이 비극적 상황은 <아이 캔 스피크>와 <허스토리>, 그리고 <귀향> 같은 극영화들에서 감정적으로 재현되어 왔다. 영화<김복동>이 이 영화들과 차별되며 힘을 갖는 지점은 인권운동가로 거듭나는 김복동 할머니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위안부로 끌려갔던 지옥 같던 비극을 재현하며 슬픔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존엄과 자존을 지키기 위한, 부단히 노력하는 사람의 일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달라진다.



다큐멘터리에 쓰인 대부분의 영상기록들은 여든이 되던 해 여전사로 살기로 작정하고 부산 다대포의 집을 다 정리한 후, 만남의 집으로 이사 오는 김복동 할머니의 놀라운 결기와 바위 같은 의지를 보여준다.

무려 생의 마지막 14년을 불꽃처럼 자신의 의지를 고통스럽게 관철시키는 여전사 김복동의 고단한 삶을 보고 있노라면 경외감마저 느끼게 된다.



영화의 말미에 이르면 김복동 할머니라는 분은 위안부 인권운동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매주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위안부 문제를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해 90의 노구를 이끌고 비행기에 몸을 싣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강행군을 감내하는 김복동 할머니는 한 순간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미국 글렌데일에 세워진 소녀상의 손을 꼭 잡는 모습이나 강제 동원한 위안부는 없다는 망언을 한 일본 관리를 찾아가 여기 증거가 있는데 왜 없다고 하는냐 항의하는 장면, 재일 조선인 학교에 장학금을 전달하는 할머니의 행보는 그 어떤 화려하거나 다양한 기법의 다큐멘터리들보다, 극적으로 만들어진 그 어떤 극영화의 스토리텔링보다 힘이 세다.

 

“저는 서울서 온 피해자, 나이는 90세, 이름은 김복동입니다.”

세계 각국을 다니며 90의 노인이 자신을 밝힌다. ‘내가 부끄러울 일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들어라! 이 늙은이들 다 죽기 전에 사죄하고 배상하라.”

그게 돈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돈 몇 푼 받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 말살당하고 지워진 인권을, 자신들의 인격을,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짓밟은 너희들이 잘못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인정을 하고 사죄를 해야 용서도 할 것이 아닌가.



한 사람이 자신의 전 존재를 다 걸고 부당함에 저항하고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죽음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존경의 염이 절로 생기게 한다. 잔혹하고 슬픈 역사 자체를 몸에 아로새긴 한 인간의 지난한 몸짓. 남의 전쟁에 쓸려가 희생된 식민지 여성의 삶 같은 건 다시 생기지 않도록 기억해야 할 이름, 김복동이다.

 

주제가 동영상의 막간에 보이는 영화 장면 중 할머니들 다 돌아가신다 해도 꼭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겠노라는 어린 여학생들의 당찬 포부를 들으면서 나는 다시 눈물이 왈칵 솟는다. 시위를 하며 기자회견장 바닥에 서로 팔짱을 끼고 드러누운 젊은 여학생들이 한명씩 끌려 나가며 끝까지 외치는 목 쉰 구호를 들으며 위안부 문제는 단지 지나간 역사 속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미 절망에서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으니까. 그렇게 또 봄은 올 것이고, 할머니들이 뿌린 씨앗은 어여쁜 꽃으로 우리 안에서 활짝 피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 김윤아는 한국의 영화평론가이며 건국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영화와 애니메이션, 스토리텔링과 신화, 섹슈얼리티에 관한 강의를 오래 해왔다.

이야기공작소 파수의 대표이며 동국대학교 영화연구소 씨네포럼 운영위원, 아모르문디 출판사 영화총서 총감독이기도 하다. 또한 각종 영화상 및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및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화스토리텔링』, 『예술로서의 애니메이션』, 『미야자키 하야오』, 『포켓몬마스터 되기』, 공저로는 『신화, 영화를 만나다』, 『유라시아 신화여행』, 『아시아 신화여행』, 『신화의 숲에서 리더의 길을 묻다』, 『영화서사 자세히 읽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