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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72호]<특집> 기림의날의 단상

  • 작성자진흥원
  • 작성일2019-08-27
  • 조회1235



일본군'위안부'피해자 기림의 날의 단상




기림의날 단상

 

-일본군위안부문제연구소 윤명숙 팀장

 

 

아니예요

노인은 자신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라는 것을 부인하였다.

2006년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회에서 동료와 함께 조사를 나갔을 때 일이다.

 

신청인은 조카였는데 누나와 함께 사촌누나가 동원되었고 최근에 사촌누나와 연락이 닿지 않게 되었다고 하였다.

신청 내용에 적힌 동원 당시 상황이 비교적 명료했다. 노인은 양로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첫 방문부터 노인은 경계의 몸짓을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가족과 함께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고 상인으로 큰 돈을 벌었다는 등 여장부의 면모를 되풀이 하여 들려주었다.

 

두 번째 방문했을 때도 마찬가지 태도였다. 노인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행간에서는 위안부피해자일 거라는 심증이 갔지만, 본인이 극구 부인하는 상황에서 더 이상 조사를 계속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노인이 일본군위안부피해자였다는 사실은 조사를 종료한 이후 판명되었다. 정부에 피해자로 등록된 자료를 뒤지면서 발견하게 되었는데, 신청인의 누나(당시 이미 고인)가 피해자로 등록하면서 사촌 신상까지 정확하게 적어놓아서 알게 되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노인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고 지금도 그때 그 결정은 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김학순 여사를 처음 만난 것은 1991930일이다. 공개적으로 증언한 지 한 달 반 정도가 지난 때였다. 그간 국내외, 특히 일본에서의 주목이 집중되어 일본인 기자들의 인터뷰가 빈번하여 상당히 피로감을 느낄 때였을 거라고 생각되었다.

 

처음 김학순 여사를 보았을 때의 인상은 차가우리만치 차분하다는 느낌이었다.

만주에서 태어난 학순은 백일도 안되었을 때 아버지가 사망하였다. 어머니는 두 살도 되지 않은 갓난아이를 데리고 고향인 평양으로 돌아왔다. 가난한 친정이 두 모녀를 보듬어줄 수는 없었다. 삯바느질이나 빨래 등으로 연명하다가 학순의 어머니는 재혼을 한다. 재혼 후 계부와 함께 사는 것이 싫은 학순은 기생 공부를 하고 싶다고 졸랐다. 아마도 재능이 있는 여자아이가 자신의 힘으로 독립할 수 있는 길이 많지 않았던 시대에 선택한 길이었으리라.

 

양부 집에서 보내주는 기생공부를 마치고 언니라고 부르던 여자애와 함께 양부는 둘을 데리고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에서 여자애 둘을 데리고 있는 양부를 불러 무릎을 꿇리고 호통을 치는 동안 둘은 군인 트럭에 실려 중국 북부지역의 위안소로 끌려갔다.

위안소에서 지내던 어느날 은전장사를 하던 남자가 몰래 들어왔다. 새벽에 나가려는 남자를 잡아 자신을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헌병을 부르겠다고 윽박지르는 한편 애원했다.

그렇게 위안소를 탈출한 학순은 은전장사와 함께 아이를 낳고 해방이 되어 귀국했다. 학순 여사가 증언을 결심했을 때는 남편도, 아이 둘도 잃고 혼자 남아 67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는 커밍아웃한 후 마음에 걸리는 가족이 없어서 용기내어 증언할 수 있었다고도 말했다.

그는 일본정부가 위안부는 민간업자가 데리고 다닌 것이라고 보도한 뉴스를 듣고 당치도 않은 말이다. 50년이 넘도록 평생을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데라고 분개했다.        

 

당일은 김학순 여사 외에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였던 분과도 약속이 되어 있었다. 덕수심상소학교 고등과 2년 때 담임이 일본에 다녀오면 선생 자격을 준다고 하여 응했다고 하였다.

이 분의 경우 위안부로 끌려간 것이 아니고 여자근로정신대여서 노동 동원 피해자였지만 해방 이후 한국에서는 정신대가 위안부라고만 알려져 있어서 양자 간의 차이에 대해서 무지했다. 그래서 이 분의 경우도 결혼해서 남편에게 정신대로 끌려갔던 사실이 알려질까봐 노심초사했노라고 털어놓았다.

 

한국에서 해방 이후 정신대는 일본군위안부라는 별칭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90년대 들어서 피해자들의 신고 전화에 의해서 여자근로정신대라는 것이 또 있고 일본군위안부와 다르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양측 모두 일제에 의한 피해자임에도 일본군위안부가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는 한편 근로정신대 피해자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했다는 생각이 든다.

근로정신대 피해자의 경우도 1992년경부터 일본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했지만 패소했고, 한국에서 2012년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소송을 하여 대법원에서 배상판결이 내려졌지만 회사도 일본정부도 아직까지 사과를 한 적이 없다.

 

814일은 기림의 날이다. 정확하게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이다. 2019814, 작년에 이어 두 번째 기림의날 행사가 정부 주도로 치러졌다. 814일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김학순님(19241997)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위안부피해자로 공개 증언한 날을 기념하여 정해졌다.

이날은 2012년 일본군 위안부 문제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에 의해 세계 위안부의 날로 지정돼 매년 다양한 기념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러다가 201712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을 일부 개정하고, 2018613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을 시행함으로 기림의 날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법률에서는 기림의 날 의의를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국내외에 알리고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하여 매년 814일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로 한다.”

 

기림의 날은 김학순 증언부터 비롯되었지만, 기림의 날은 수많은 김학순들을 기리는 날이다.

수많은 김학순들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뿐만이 아니라 중국, 인도네시아, 티모르, 베트남, 필리핀, 태국, 버마(현 비르마), 네덜란드나 프랑스 여성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거나 일본군 병사의 성폭력 피해자가 되었다.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다.

 

김학순의 증언 이후 아시아 피해국으로 이어진 커밍아웃 생존자들은 28여 년 지난 지금 대부분 고인이 되었다.

1991814일 이후 오늘까지 우리는 피해자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제부터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이야기 속에는 그들 자신만의 이야기뿐만 아니고, 위안소에서 고인이 된 분이나 패전 직후 귀향길에서 죽음을 맞이한 분들도 있었다. 혹은 일본의 패전 직후 두 번 다시 고향이 돌아오지 못하거나 고향에 돌아왔지만 다시 고향을 등지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김학순들이 또 있었음을 기억하자.

어렵게 살아 돌아왔지만 맨 앞에서 얘기한 노인처럼 자신이 위안부피해자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 분들도 더 계시리라. 우리는 이들 모두를 기억해야 한다.

 

더 나아가 기억에서 그쳐서도 안된다. 그들의 경험은 후세대인 우리가 살려나가야 한다. 한국사회를 더 나은 사회로 만드는 거름으로 삼아야 한다. 가깝게는 여성에 대한 성폭력 문제, 여성혐오, 여성차별을 넘어 인간에 대한 권리로서 성평등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사유하고 행동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