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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70호] ‘증오’가 아니라 ‘폭력’이다 -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읽고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2019-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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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가 아니라 ‘폭력’이다 

- 스티그 라르손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읽고


리외 (유튜브 채널 수북 운영자, 프리랜서 리서처/번역가)



2014년 어느 가을 밤, 나는 암스테르담의 한 골목을 걷고 있었다. 


붉은 불빛이 두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이른바 ‘홍등가(red light district)’는 아름답고 고요한 운하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성매매 종사자 박물관(red light secrets)’ ‘라이브 섹스쇼’ ‘섹스 극장’이 곳곳에 펼쳐져 있으며 ‘성매매 정보센터’도 있다는 암스테르담의 밤거리, 저녁 6시가 되면 일제히 켜지는 붉은 불빛 아래, 속옷만 입은 성매매 종사자 여성들 수백 명이 ‘손님’을 기다리는 ‘홍등가’를 나는 인파에 떠밀리며 멍하니 걸었다. 통유리 안쪽에 여성들이 각기 다른 포즈를 취한 마네킹처럼 서있고, 이제 막 출근한 여성들은 캐주얼한 복장 차림으로 들어와 동료에게 쾌활하게 인사를 건네곤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호기심 가득한 각국의 관광객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는 남성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홍등가’의 성매매 종사자 중 많은 이들이 불가리아, 루마니아, 폴란드 등 동유럽권 국가들에서 온 여성들이라는 것은 이후에 알게 되었다. 성매매가 합법인 국가에서 아무렇지 않게 ‘업무’를 시작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성매매 종사자들의 다양한 사연을 짐작하기에 앞서 아득한 마음, 불편한 마음부터 덜컥 들었던 것은 나 또한 생물학적 여성이기 떄문이다. 내가 그 여성들과 곧장 등치되었기 때문이다. 


성매매 관련 대화를 나눌 때마다 “그래, 어려운 문제지”라며 얼버무렸던 이유 또한 성매매가 은밀하면서 동시에 공공연한 일종의 ‘산업’이 되었으며, 그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당사자성과 개별성을 고려해야 하지 않나 하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내가 그 여성이 될 수 있고, 그 여성이 내가 될 수 있는, 여성의 성 상품화가 이토록 만연한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몰라 꽤나 오래 서성였다. 


성매매 자체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한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성매매를 합법화한 국가를 어떻게 바라보면 좋은가? 성매매에 종사하는 여성들, 성을 구매하는 남성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그 질문은 스티그 라르손의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Man som hatar kvinnor, 2005)」을 접하기 전까지 끈질기게 뒤통수를 붙잡았다. 





스웨덴의 작가이자 사회문제를 고발하는 저널리스트였던 스티그 라르손의 첫 장편소설 시리즈 ‘밀레니엄’ 중 1부인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장르상으로 추리소설이다. 한 탐사보도 기자와 잡지사 기자가 40여 년 전 실종된 어느 소녀의 사건을 파헤쳐가는 내용인데, 언뜻 보면 상당히 많이 소비된 듯해 보이는 소재와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출간되며 초대형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 왜일까.


지나치게 현실을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본다. 실종된 소녀의 아버지는 사실 여성들을 납치해 고문, 강간한 후 잔혹하게 살해하는 연쇄살인마로, 소녀의 오빠 또한 강간과 살인에 참여시켰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소녀는 아버지와 오빠에게 지속적인 성폭행과 학대를 당하다 어느 날 그 끔찍한 환경으로부터 도망치게 되었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권력 비리의 추리게임이 시작되는......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설정’이 아닌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 너무나 많이 활보하는 현실을 우리는 시시각각 체감하고 있지 않은가. 여성에게 약물을 투여한 뒤 성폭행하고 그 영상을 찍어 단체대화방에 공유하는 연예인과 성매매 알선 및 혐의를 받았음에도 구속영장이 기각된 또 다른 연예인, 건설업자에게서 금품과 ‘성접대’를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 법무부 차관, 그리고 그 뒤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관계자들, 가해자들...... 


돈과 권력을 이용해 여성의 성을 상품화하는 행위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만연하므로 어쩌면 ‘증오’라는 단어는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 남성들은 여성을 동등한 행위자로서 그저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여성을 유약하거나 열등한 객체로, 일종의 대상으로, 심지어 우습게 여기기에 성매매와 성착취를 습관처럼 행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웃으면서, 친구들과 자랑스레 공유하면서. “운이 나빠 (그들만) 걸렸다”는 말이 괜히 들리는 게 아니다. 


소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은 스웨덴 성구매자처벌법이 제정된 1999년으로부터 6년 뒤에 출간되었다(라르손이 3부까지 탈고한 것은 2004년. 이 시리즈를 해당 법의 시행과정 및 경과의 연장선상에서 읽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한국처럼 스웨덴에서도 성매매는 불법이다. 성매매를 돈과 권력에 의한 착취이자 인권침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한국과 다른 점은, 성 구매자만 처벌받는다는 것.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또한 성매매 ‘산업’에 여성들이 어떻게 유입되는지를 상세히 그려낸다. 암스테르담 ‘홍등가’의 많은 여성들처럼, 스웨덴에서도 자국민이 아닌 동유럽, 동남아시아, 남미 등의 지역에서 온 많은 여성들이 성매매 쪽으로 유입된다. 소설은 마피아 등 범죄 조직과 성매매의 결탁 관계도 다루면서, 이중 삼중으로 착취와 폭력이 발생하기 용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이렇듯 성매매는 사회구조의 모순에서 비롯된, 강요된 행위로 규정된 반면, 성구매는 완전한 의지에 의한 행위이기에 성구매자만 처벌받도록 하는 것이 스웨덴의 법이다.



‘밀레니엄’ 시리즈의 저자 스티그 라르손 (Wikipedia)


스티그 라르손의 데뷔작이자 유작이 된(그는 책의 출간을 반 년 앞두고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사망했다) ‘밀레니엄’ 시리즈는 전 세계 30여 개 국에서 출간되며 초대형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성매매에 대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던 그는, 1999년 이전 17.6%였던 스웨덴 남성의 성 구매율이 2010년에는 7.6%로 크게 줄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성매매가 대등한 거래 관계로 발생하는 ‘매매’가 아닌, ‘권력자’에 의해 ‘피해자’가 발생하는 폭력 범죄의 성격을 짙게 띤다는 생각을 나는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을 읽으며 비로소 명료하게 지니게 되었다. 때로 소설 한 권은 뉴스 기사보다 더 명징한 인식과 판단을 가능케 한다. 여자를 증오하는 남자들을, 아니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성과 관습화된 착취 구조를, 소설보다 더한 부조리가 난무하는 현실을 지나치게 자주 목도하지 않는다면야 더욱 좋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