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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레터 69호] 어린이·청소년 페미니스트를 위한 동화

  • 작성자관리자
  • 작성일2019-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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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어린이가 상상하는 삶의 높이와 넓이


김지은 아동문학평론가



어린이책에는 어떤 인물이 가장 많이 등장할까? 미국의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캠퍼스에서 어린이책 기관 협회의 자료를 바탕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15년에 출간된 어린이책 가운데 73.3%는 백인(White) 인물의 삶을 다루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렇다면 2위는 누구였을까? 12.5%의 책이 다루었던 트럭, 개, 장난감 같은 비인간캐릭터(non-human)들이었다. 이어서 7.6%의 인물은 아프리카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3.3.%가 아시아인과 아시아계 미국인이다. 이 자료에서 우리는 어린이가 책을 통해서 접하는 정보와 이야기 속에 나타난 인물의 시각이 얼마나 편중되어 있을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정량적인 평가에 불과하며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그 소수자들이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어떤 직업과 가치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지는지는 분석하지 않은 상태의 자료이다. 어린이책에 나타난 다양성에 대해서 꾸준한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비교적 활발하게 논의되는 편인 인종 다양성에 대한 자료가 이 정도다. 성별, 장애, 동물의 권리 등을 들여다보면 아직도 대부분의 어린이책은 압도적인 다수자 편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 문제는 더 깊게 구체적으로, 더욱 자주 논의되어야 한다는 것이 연구를 진행한 학자와 현장 전문가들의 얘기다.


우리 어린이책은 어떨까. 이른바 거리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서라도 빈번하게 소수자를 등장시키고자 하며 혐오 표현을 지적 받았을 때 작가와 편집자가 이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바로잡는 절차가 여러 경로로 마련되어 있는 미국에 비하면 우리의 상황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단계라고 볼 수 있다. 인권 감수성이 높은 어린이책을 발견하여 알리고 여러 각도에서 비판적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작품과 논점을 발굴하는 것이 필요하다. 2019년 4월에 열린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에서는 “시간은 그들의 편이다-어린이책 속의 여성(Time is on their side. Woman in children’s books)”이라는 주제로 세계 각국의 어린이책 작가, 평론가, 출판인, 편집자, 기자 등이 함께 모인 세미나가 열렸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 자리에서는 최근 어린이책 변화의 핵심에 ‘여성’이 있으며 이것은 상당히 힘 있고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발언이 이어졌다. 어린이책 속에서 여성을 소비자보다는 생산자로, 대상화된 존재가 아닌 주체로, 세대와 계급으로 분리되어 대적하는 사이가 아니라 장벽을 뛰어넘어 연대하는 관계로 그려내려는 적극적인 움직임들이 눈에 띈다는 것이다. 


우리 어린이책도 학교 현장, 도서관, 지역의 독립서점, 작가연대, 출판인과 독자들의 자발적인 모임 등을 통해 세계 어린이책의 역동적인 흐름에 합류하면서 크고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지식정보를 담은 어린이 교양서에서 시작된 성평등한 어린이책 출간의 움직임은 최근 출간되는 그림책 속의 인물을 바꾸기 시작했으며 유년동화, 장편동화에서도 새로운 여성 인물 유형을 속속 등장시키고 있다. 







신인인 신현이 작가의 동화 『아름다운 것은 자꾸 생각나』는 작품 속 등장인물 중 한 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여성이다. 단순히 인물의 성비를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일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여성 어린이가 여성이 주인공인 서사를 만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으며 그것이 모험 서사이거나 지도자의 성장 서사일 때는 여성 인물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세계 그림책 역사의 95% 정도가 백인 남성 주인공 모험 서사인 현실에서 이 작품이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나이를 뛰어넘은 여학생과 여교사의 자매애, 여성 교장 선생님과 여성 기간제 교사의 수평적 관계를 중요한 요소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동화에서 직급의 유리천장은 현실 못지않게 강력해서 지금까지 여성 교장이 등장한 작품은 드물었을 뿐 아니라 여성 교사의 상은 예민하고 신경질 가득한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지곤 했다. 현명하게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이 작품 속 여성 교장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다. 그리고 비정규직 비혼 여성인 기간제 교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해 가정폭력으로 가스라이팅을 당해왔던 여성 어린이들과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도 아름답게 그려진다. 주목할 만한 부분으로 보인다.    





역시 신인인 전수경 작가의 『우주로 가는 계단』은 더욱 흥미롭다. 이 작품에는 과학 잡지를 끼고 사는 여성 어린이 홍지수와 은퇴한 여성 과학자 오수미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한 아파트에 사는 이웃인 두 사람은 천체 물리학에 대한 관심으로 친구가 되고 대화를 통해 그동안 알던 세계의 영역을 넓히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둘도 없는 우주가 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기존의 성역할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인물 자체의 개성과 매력을 지니고 있는 것도 눈에 띈다. 여성과 거리가 멀다고 여겨졌던 전문적인 수학과 물리학 용어들을 능숙하게 주고받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동안 지녔던 통념을 시원하게 무너뜨린다. 판단이 빠르고 문제 상황에 대한 대처에도 적극적인 여교사 은서, 성숙하면서도 신중하고 분석적인 민아 등 나오는 여성 인물들의 모습이 하나하나 무게감이 있다. 물리학자 펜로즈를 좋아하는 여자 어린이를 동화에서 만나게 된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다.



 



여성과 소수자의 존재와 권리에 대한 주목이 동물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는 경향도 보인다. 여성과 약자들의 연대를 그려내면서 정상 가족 패러다임을 깨뜨리는 작업을 계속 해왔던 백희나 작가는 『나는 개다』를 통해 길에 버려진 동물을 주인공으로 세웠으며 동아시아 여자 어린이의 주체적이고 도전적인 모습을 작품에서 꾸준히 보여주었던 이수지 작가는 『강이』를 통해서 어린이와 버려진 동물이 어떻게 하나의 삶으로 서로를 바라보는지를 말한다.


어린이들은 책을 통해서 자신의 삶이 어디까지 넓어지고 높아질 수 있는지 생각하고 배운다. 그런 점에서 어린이책의 인물들이 달라지고 있는 양상은 여성 어린이들의 삶에 대한 상상력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고 예상되는 건강한 신호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이 문제를 고민하는 작가들이 나오기를, 그리고 그들의 작품이 출간되어 독자들의 손에 닿기를 기다리고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