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서 생각하지 뭐.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너랑 함께 다니는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 (from. 황효진)
밤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는 날, 혹은 새벽에 갑자기 잠에서 깨어난 날이면 불안감에 갑자기 심장이 빠르게 뛰기도 합니다. 오늘 마쳤어야 하는데 다 하지 못한 일, 다가올 계획, 통장 잔고 같은 것들을 떠올리다보면 종착지는 언제나 하나예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뭘 해야 할까?’ 답 없는 질문에 어떻게든 나만의 답을 찾아보려고 하다가 결국은 매번 ‘미래는 알 수 없으니 지금을 열심히 살자’라는 결론을 내리고는 합니다. 그렇게 대충 묻어둔 불안과 두려움은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고개를 들고요.
주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 봐도 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인 것 같습니다. 다가올 날들이 크게 기대되지 않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까? 지금처럼 계속 일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렇게 살다보면 끝에는 뭐가 있는 걸까? 지금 내가 무심코 하는 선택이 미래의 방향을 어떻게 바꿀까? 이런 고민들을 삼십대 후반까지 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대체로 이런 생각을 하며 지내고 있는 나날들입니다.
이런 시기에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를 다시 보게 되어 다행입니다. 이 영화가 처음 개봉됐던 2001년에는 고등학교 때 친했지만 대학생이 되어 서로 자주 만날 수 없게 된 친구들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어떤 영화는 정확하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아주 아주 긴 시간을 필요로 하기도 하더라고요. <고양이를 부탁해>가 ‘우정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보다는 고등학교 때 비슷한 그룹으로 묶여 살아가던 여성들이 각자의 상황에 따라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IMF가 터진 직후.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태희, 혜주, 지영, 비류, 온조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학교를 벗어나 사회생활을 시작합니다. 태희는 아버지의 일을 돕지만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가족은 그를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여깁니다. 혜주는 회사에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한 다른 여성들과 비교 당하며 ‘저부가가치’ 인간 취급을 받습니다. 몸이 편찮으신 할아버지, 할머니와 가난하게 살아가는 지영은 해외 유학을 꿈꾸지만 현실은 당장 일할 곳도 마땅치 않은 형편입니다.
주변에 참조할 만한 여성이 없는 이들의 공통적인 공포는 ‘나에게도 미래가 있을까?’입니다. 태희와 지영은 길에서 행색이 좋지 않은 여성과 마주치고, 지영은 “난 솔직히 저렇게 될까봐 무섭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태희는 아버지의 강압적인 분위기가 지배하는 집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엄마를 봅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이 있는 곳이 아닌 다른 어딘가를 꿈꾸지만, 그 어딘가가 어디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여기’가 아닌 것이 더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태희는 집에 머무르는 대신 짐을 챙겨 집을 나와 지영에게 함께 떠나자고 말합니다. 어디로 가냐는 지영의 질문에 태희는 답해요. “가면서 생각하지 뭐. 혼자 다니는 것보다는 너랑 함께 다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2001년에 스무 살이었던 태희와 지영은 2021년인 지금 마흔이 되었을 것입니다. 혼자 현실을 버티는 대신 다른 어딘가로 ‘함께’ 떠나기를 선택한 이들은 어떤 여성이 되었을까요? 떠나봤더니 거기도 별 것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수도, 떠난 곳에서 완전히 새로운 삶을 꾸리게 됐을 수도 있습니다. 마흔에 가까워진 제가 여전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걱정하는 것처럼 그들도 스무 살 때와 별 다를 바 없는 고민을 하며 지내고 있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함께 떠나본 경험은 그들에게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그 덕분에 예전과 비슷한 고민을 하더라도 그들은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난 3월부터 지금까지 편지를 쓸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제게는 이 편지를 쓰는 일이 어디로 갈 것인지 가면서 생각하는 일,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다니는 일이기도 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내일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도 꽤 괜찮게 느껴집니다. 편지가 끝난 후에도 어디선가 또 만나요. 그리고 함께, 어디로 가야 할지 가면서 생각해요.